한국의 판타지 설화

2009 서울문화재단 기획전
북아트 <은혜 갚은 두꺼비> 

한국의 신이(神異)한 스토리를 찾아서 

우리 나라 우리 땅에는 다양한 설화들이 전해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의 설화를 접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설화는 화자의 상상력과 입담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인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화자가 드물어졌다. 그렇게 우리의 설화는 잊혀져 갔고 낡은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낡고 무미건조한 텍스트로만 남은 한국의 판타지 설화들을 현대적 상상력으로 새롭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설화 <은혜 갚은 두꺼비>

한 여인이 음산한 숲속에서 칼을 빼들고 있다

그녀가 바라보는 숲속 안개 너머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까 

그녀는 이 마을을 공포에 몰아넣은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그녀를 숲속으로 끌고 왔던 사내들은 아무런 위로의 말도 하지 못한다. 함께 자란 그녀를 무기력하게 바라볼 뿐이다

이들은 공포의 근원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간다. 그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은 안개에 휩싸인 신성한 숲에 처녀를 바치는 것뿐이라 여긴다

여인은 사내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스스로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싸울 태세다

철제 제단 위에서 그녀의 곁을 지키는 것은 그녀가 키워온 두꺼비 한 마리 뿐이다

그러나 그녀가 칼을 겨누는 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곳 사람들의 눈으로는 안개 너머 공포의 실체를 보지 못한다

오직 두꺼비만이 이 세계를 지배하는 공포의 근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두꺼비는 자신의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오랜 세월 마을을 공포에 몰아넣고 제물을 요구하는 신

거대한 괴물 지네

지네는 고민에 빠져있다. 안개 속에서 제물을 거두어야 하는데 위험한 두꺼비 때문에 섣불리 나설 수가 없다. 두꺼비의 독은 지네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돌려보낼 수도 없다. 안개 너머의 공포가 지속되어야 지네가 이 세계를 계속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네는 이 안개가 걷히기 전에 두꺼비와의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메타포의 성찬 <은혜 갚은 두꺼비> 

현대의 장르로 보면 〈은혜 갚은 두꺼비〉는 호러판타지 문학에 해당된다. 이런 어두운 이야기의 상징과 의도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혼돈의 시대를 평화롭게 만든 불세출의 영웅. 그런 영웅을 잊어버린 사람들. 죄의식. 불안과 공포, 재난에 대한 무지. 처녀만을 제단에 받치는 성적인 억압. 다분히 남성의 성기나 칼을 암시하고 있는 지네의 이미지. 그리고 겁탈 당하는 무기력한 여성의 이미지. 치마폭에 숨겨진 두꺼비의 이미지는 당대 여성에 대한 심층적인 억압으로 보여 진다. (신화나 전설 속에서 두꺼비는 보통 달의 정령이거나 집안의 부를 관장하는 업두꺼비로 알려져 있지만 이 설화에서는 이야기의 흐름 상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흥미로운 것은 숨겨지고 억압된 두꺼비가 바로 해결의 실마리가 된다는 것이다.

억압된 서사 속의 여성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네를 죽이고 살아남은 여성이다. 하지만 전해내려오는 텍스트는 이 여성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있다. 이 여성을 행복하게 만든 것은 덕 많은 벼슬아치’라고 마무리 짓고 있는 것이다. 정작 벼슬아치들은 이 마을이 위험에 빠졌을 때 아무도 도움을 주지 못했음에도 전혀 설득력이 없는 스토리로 마무리 짓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텍스트를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서사의 주객이 전도됐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한국의 판타지설화 속 히로인

그렇다면 이 설화 속의 진정한 영웅은 누구일까. 지네와 한 판 싸움을 벌이는 두꺼비일까. 전세계 영웅 서사에는 늘 위기에 빠진 주인공을 돕는 조력자가 등장한다. 두꺼비는 그런 조력자에 해당한다. 영웅은 조력자의 도움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한다. 이 설화 속의 영웅은 바로 제물로 바쳐진 처녀일 것이다. 지네와의 사투 속에서 살아남은 그녀가 지네의 머리통을 들고 산을 내려가 마을의 사내들 앞에 섰을 때를 상상해 보자. 메두사의 머리통을 자른 페르세우스에 버금가는 영웅의 면모와 무엇이 다른가.
한국 판타지설화 속에서 히로인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